보이스피싱, 아름다운 이야기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9월 21일 월요일, 오후 1시 10분 경.

회사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업무를 시작했다.
일이 쌓여있어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친누나가 네이트온으로 말을 걸어온다.

"바쁘니?"

"아니, 말해."

급한 일이 있으니 돈을 좀 빌려달라고 하는데, 이건 누나와 나 사이에 흔히 있던 일이었다.
나는 별 의심하지 않고 다시 묻는다.

"어, 얼마?"

"응.. 한 200만원 정도인데..."

여기서 한번 의심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친구도 아니고, 직장동료도 아니고 '가족'이었다는 점에서 의심을 못했다.

"나 지금 통장에 140만원 뿐이다. 200은 안된다."

"그럼 120만원 정도만 넣어줘."

지금 생각하면 분해 죽겠지만 200만원이 없었으면 없다고 했어야지,
빌려주고 싶어서 있는 돈이라도 주려고 내 전 재산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었다...

더욱이 의심을 해야할 타이밍에 나는 또 한번 기회를 놓치고 만다.

우리은행 계좌와 예금주명이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것이다.
여기서 10이면 9 의심을 해야하지만, 누나에게는 큰 변수가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

누나는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었고, 평소에 거래처 사람 및 업주들과 돈을 주고 받는 일들이 잦아서,
그와 관련된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버린다.

그리고 송금을 한다.
120만원.

누나는 저녁 9시에 다시 돈을 보내줄테니, 확인해보라고 하고 사라진다.

그렇게 9월 21일 월요일은 지나간다.





9월 23일 수요일, 오후 10시경


돈을 쓸 일이 있어서 은행에 간다.

누나에게 들어와야했을 돈이 들어오질 않았다.

"아... 아직도 안줬네... 뭐야..."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적은 돈이라면 몰라도 큰 돈을 갚지 않을 누나가 아니다.
지금이면 잠을 자고 있을테니, 내일 오전에 누나에게 전화를 해야지 생각한다.



9월 24일 목요일, 오전 10시경


누나에게 전화를 한다.

"돈 언제줄꺼냐."

"무슨 돈?"

더 이상의 대화를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냥 '무슨 돈'이란 한마디에 당했다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일단 대책을 마련해보자고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옆자리에 있는 회사동료들은 주식으로 50~60만원이 하루에 날라갔다며 난리다.
난 하루 아침에 120만원이 증발했으니 조용히 입다물고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무지하게 쪽팔린데...

잠시 후 누나(이제 부터는 진짜 누나다)와 다시 통화를 했는데, 이야기는 이렇다.

내가 네이트온 보이스피싱을 당할 시점인 월요일 정오쯤에 누나는 집 밖에 있었나보다.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는데, 번호를 보니 인터넷폰인 듯 싶었고,
무슨 신한은행 대출조회과(?)라는니 하며 주민등록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단다.

당연히 누나는 무슨 소리라며 끊었지만 그런 전화가 40번은 더 왔다고 한다.
말투는 어눌한 것이 중국사람인 마냥 어색하였고, 이것은 분명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한 누나는
욕을 하며 신고할거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렇게 전화와 씨름을 한 후,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한다.

"너 나한테 돈빌려달라고 했어?"

친한 친구부터 시작해서 한동안 연락도 안했던 친구들까지 다양하게 전화가 왔다고 한다.
이게 정상이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전화를 확인을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이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친구였으면 나도 전화를 했을 것이다.)

누나는 당장 집에 들어와 네이트온에 접속하려 했으나, 이미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고
네이트에 전화를 걸어 비밀번호를 다시 변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은 모두 마무리되었다고 안심하였다고 한다.

참 아름답게도 바로 다음날이 내 생일이기 때문에,
내가 네이트온에 접속하면 생일선물로 뭘 갖고 싶냐고 묻고 싶었으나, 나는 접속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수밖에... 그 빌어먹을 중국새끼들이 나와 대화하고는 날 차단시켜놨으니...


여하튼 누나의 이야기는 여기 까지다.


9월 24일 목요일 오후 3시경.

도저히 회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네이트에 요청한 21일자 누나 아이디의 로그기록(IP주소)
21일 보이스피싱 당한 네이트온 대화내용 저장물
우리은행으로 계좌이체한 내용

모두 출력하여 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외근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누나와 함께 그나마 집에서 제일 가까운 용인경찰서 사이버수사대에 간다.

그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모두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수사관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줄까요? 아니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줄까요?

아름다우면서도 충분히 현실 가능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름다움과 현실을 공존할 수 없었나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요."

"네, 돈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은 1%도 안됩니다."

어차피 IP도 중국 아이피일 것이고, 전화번호도 중국에서 접속한 인터넷폰 번호일 것이라고 한다.
이미 돈은 입금했으며, 입금한지 벌써 3일이 지나버렸다는 것이다.

조사관은 내가 입금했던 우리은행 남모씨의 계좌를 가르키며 말한다.

"돈을 못 찾더라도 이 사람이라도 처벌하실래요? 어차피 이사람도 자기 명의를 진범한테 판거예요."

일명 대포통장이다.
어차피 돈은 못찾는다고 하니, 그 놈이라도 잡고 처벌했으면 했다.

"네. 그 사람이라도 처벌하지요."

그리고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진술서 작성이 시작된다.
조사관은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나는 계속 대답을 한다.
조사관은 열심히 타자를 두드린다.

거의 막바지였던 것 같다.

"우리은행 계좌는 지급정지하셨고요?"

"네?"

"최영환씨가 입금했던 우리은행 통장, 지급정지하셨냐고요."

"아... 그런게 있었나요..."

그런게 있는지 조차 몰랐다.
어차피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난 돈을 부치고도 3일 동안이나 사기인줄 모르고 있었으니,
어차피 재빠르게 지급정지를 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사관은 내가 지급정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순간 눈이 번쩍인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들고 우리은행에 전화를 건다.

내가 입금한 계좌번호와 예금주명을 알려주고는 지금 이통장이 어찌되었느냐고 묻는다.
그렇게 긴 통화는 아니었다.

'그러니까요...'
'아, 네네 그러니까요...'
'그렇죠.'
'그렇죠...'
'아니 그래도 피해자분은 답답해 하시잖아요?'
'네네'

건너편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조사관이 한 말만 들었지만 그리 난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 다음에 계속----

by 핫쨩 | 2009/09/27 12:10 | [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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